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라만 왕조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카라만 터키.jpg|width=760]] 수도였던 [[카라만]] (라렌데)의 성채 오스만과 마찬가지로 13세기 초엽 몽골 침공을 피해 아나톨리아로 이주한 튀르크 무슬림들이 세운 [[아나톨리아 베이국]]이다. 시조인 호자 사드렛틴과 누레 수피 베이 부자는 1230년경 캅카스의 아란 지역에서 시바스로 이주하였다. 1240년 [[룸 술탄국]]을 뒤흔든 바바 이스학의 반란 후 그들은 타르수스 산맥 서부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1243년 쾨세다으 전투 후의 혼란을 틈타 누레 수피 베이의 아들 케리멧틴 카라만 베이는 옛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가 영지를 부여했다며 일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13세기 중반 카라만 베이는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을 공격하여 해안을 장악하였다. 공격에 시달리다 못한 아르메니아 왕국은 [[일 칸국]]에 복속하고 그 보호 하에 연명할 수 있었다. 동시에 룸 술탄국의 내전에 개입한 카라만 베이는 1260년경 라렌데를 얻을 수 있었다. 1262년 카라만 베이의 사후 그를 계승한 솀셋틴 메흐메트 1세는 1277년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의 아나톨리아 원정 시에 그와 동맹하여 룸 셀주크의 수도 [[콘야]]를 기습 점령하고 꼭두각시 술탄을 옹립하였다. 그러나 일 칸국의 반격에 콘야를 버리고 도주하던 메흐메트는 몽골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1278년) 비록 이로써 아나톨리아 중남부 방면의 팽창은 저지되었으나 카라만 조는 맘루크 술탄들의 지원을 받으며 사실상의 독립을 유지하였고, 14세기 초엽에도 기습적으로 콘야를 2차례 점령하였다.[* 두 차례 모두 일 칸국의 아나톨리아 총독에 의해 축출됨] 다만 일 칸국과 룸 셀주크가 붕괴된 후 카라만 조는 기어코 콘야를 점령하며 아나톨리아 남부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였다. 그러던 14세기 중반 카라만 조는 신흥 오스만 조와 접경하고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오스만 조가 발칸에서 원정하면 (예를 들어 [[니코폴리스 전투]]) 카라만 조는 그 배후를 공격했는데, 이에 분노한 [[바예지트 1세]]가 두 차례에 걸친 원정에 나선 끝에 1398년 멸망하였다. 1402년 [[앙카라 전투]] 후 [[티무르]]의 분열 정책에 따라 카라만 조는 부활하였고, 오스만 술탄국의 부흥을 경계하던 유럽 세력 및 [[백양 왕조]]와 연대하여 그에 맞섰다. 그러나 킬리키아를 공격한 맘루크 군에게 타르수스를 빼앗기고 콘야를 습격당하는 등 이미 국력은 쇠락한 상태였다. 1444년 [[바르나 전투]] 당시 반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술탄국이 십자군과 맞서던 틈에 카라만 군은 앙카라와 [[쿼타히야]]를 습격하였다. 역시 분노한 술탄 [[무라트 2세]]는 바르나 전투 후 아나톨리아로 귀환, 카라만 조의 공격을 이슬람에 대한 배신이라 선언하며 공격하였다. 겁에 질린 카라만 조의 이브라힘 베이는 모든 조건을 수락하고 오스만 술탄국의 제후국이 되었다. 이렇게 연명하던 카라만 조는 1470년경 [[우준 하산]]의 도움으로 자치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반격에 나선 [[메흐메트 2세]]가 오틀룩벨리 전투에서 승리하며 국운이 --시체로-- 결정되었다. 결국 1487년 [[바예지트 2세]] 시기에 오스만 제국의 카라만 에얄레트로 편입되었고, 공화국 시기에 콘야 도로 존재했으나 1993년에 카라만 도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른다. 카라만 부족은 트라키아와 아제르바이잔 일대 등으로 이주되었지만 그 이름만은 현존하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